강희(康熙) 21년(1682년)
강희(康熙) 21년(1682년), 5세 달라이 라마 아왕 롭상 가초(阿旺罗桑嘉措)는 새로 지어진 포탈라궁에서 입적했습니다.
그의 친전 제자이자 5대 ‘데바'(第巴)였던 상제 가초(桑结嘉措)는 당시의 티벳 상황을 고려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의 입적 소식을 청나라 정부와 승려, 티벳인들에게 비밀로 하였습니다.
환생 영아의 발견
엄격한 비밀을 유지한 채, 상제 가초는 5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 영아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1년 후, 티벳력으로 수돼지해(1683년), 티벳 남부 문위(门隅) 나라산(纳拉山) 아래의 가난한 농가에서 초왕람(次旺拉姆)이 남자 아이를 출산했는데, 주변에 많은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습니다. 이 남자 아이가 바로 환생 영아 창양 가초(仓央嘉措)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상제 가초는 이 사실을 계속 비밀로 유지했고, 영아는 좌정식도, 어떠한 형태의 확인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창양 가초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창양 가초는 무사태평한 시간을 보내며, 들판과 설산 초원을 놀이터 삼아 지냈고, 초연 람(仁增旺姆)이라는 첫사랑도 만났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비밀의 폭로
이 모든 비밀은 강희(康熙) 35년(1696년)까지 의도적으로 감춰졌습니다. 강희제가 몽골 포로의 입에서 이 비밀을 알게 된 것은 가르단(噶尔丹)을 친정할 때였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미 10여 년 전에 입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희제는 크게 분노하여, 상제 가초를 엄하게 질책하고 티벳을 정벌할 준비까지 했습니다.
상제 가초는 자신의 큰 잘못을 깨닫고 병란을 피하기 위해 즉시 죄를 청원하며 자진했습니다. 그는 죄를 인정하면서도 환생 영아 창양 가초를 조정에 보고하여, 강희 황제의 정식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창양 가초의 책봉
아이신 교로 현예(爱新觉罗·玄烨)
준가르를 토벌하느라 바쁜 강희제는 할 수 없이 창양 가초의 신분을 확인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15세의 청년 창양 가초의 운명이 바뀌어, 라싸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강희(康熙) 36년(1697년) 10월, 창양 가초는 라싸로 돌아온 후 포탈라궁에서 좌정식을 열어 정식으로 6세 달라이 라마가 되었습니다.
대덕 경사(大德经师)들의 세심한 지도 아래 그는 불교 경전과 범문 음운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청등고불과 라싸 거리
그러나 사춘기 반항기를 맞은 창양 가초에게는 이러한 종교 공부와 생활이 지루하고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청등고불(青灯古佛)과 무미건조한 달라이 생활에 지친 창양 가초는 때때로 속인 옷을 입고 라싸 거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포탈라궁에 살면 나는 설역의 가장 큰 왕이고, 라싸 거리를 방황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등고불(青灯古佛) – 은둔과 수도의 상징
푸른 등불과 고대의 부처는 고요하고 은둔한 삶을 상징합니다. 불교 사원에서 등불은 깨달음과 지혜를 상징하며, 고대의 부처는 깊은 종교적 수련과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청등고불”은 세속을 떠나 고요한 수도 생활을 하는 모습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티벳의 혼란과 정치적 갈등
티벳 내부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으며, 티벳인과 몽골 후예인 화석특한국(和硕特汗国), 계급 갈등, 종교 갈등 및 민족 갈등이 얽히고설켜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중재를 맡아왔던 상제 가초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상황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달라이 한(达赖汗)이 사망하고 라쫑 한(拉藏汗)이 화석특한국의 새 한왕으로 즉위하면서 티벳을 장악하려는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강희(康熙) 44년(1705년), 상제 가초는 라쫑 한에 의해 유인 살해되었고,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6세 달라이 라마도 억류되었습니다.
창양 가초의 억류와 압송
창양 가초는 대청 제국에 의해 6세 달라이 라마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라쫑 한은 그를 직접 죽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강희제에게 상제 가초가 반란을 일으켰고 창양 가초는 가짜 영아로, 상제 가초가 세운 꼭두각시이며, 그가 술과 색에 빠져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발하며 폐위를 요청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창양 가초를 보호하기 위해 강희제는 그를 베이징으로 압송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창양 가초의 마지막 여정
강희(康熙) 45년(1706년) 5월, 창양 가초는 몽골 병사들의 철저한 감시 아래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철본사(哲蚌寺)를 지날 때, 교중 신도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몽골 병사들과 격렬하게 충돌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창양 가초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베이징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강희(康熙) 45년(1706년), 창양 가초는 칭하이호(青海湖) 근처를 지나던 중 24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창양 가초의 사망 설
그의 실제 사망 원인에 대해 후세에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라쫑 한이 자신의 음모가 드러날까 두려워 청조의 실제 통제 구역에 도달하기 전에 그를 암살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충성스러운 신도들이 그를 구출해, 그가 명예와 지위를 포기하고 은밀히 티벳, 간쑤, 칭하이 등지를 여행하며 불법을 전파하다가 알샨(阿拉善)에서 평온하게 입적했다는 설입니다.
후자의 설은 점점 더 많은 사학자와 불학자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팅그리 사막에는 6세 달라이 라마의 입적지인 승경사(承庆寺)가 있으며, 허란산(贺兰山)의 광종사(广宗寺)에는 그의 진신 사리가 보존되어 있어 후대에 의해 공경받고 있습니다.
창양 가초의 유산
조정에서 책봉한 6세 달라이 라마로서 창양 가초는 티벳 불교의 전승자로, 티벳 내부의 다양한 갈등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고 티벳과 청조 중앙 정부 간의 갈등을 완화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매우 낭만적이고 시적인 시인으로 후세 사람들의 무한한 존경과 탐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창양 가초의 인물 평가
창양 가초의 세속적 가정은 닝마파 불교를 신봉했으나, 달라이 라마가 속한 겔룩파 불교는 승려가 결혼하거나 여성과 가까이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합니다. 이러한 규율에 창양 가초는 동의하기 어려워했습니다.
14년 간의 시골 생활은 그에게 많은 세속 경험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켜 시의 영감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교리로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제약하기보다는 독립된 사상 의지에 따라 많은 애틋한 “정가”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시는 대략 66편이며, 내용은 몇 편의 찬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남녀 사랑의 충실함, 즐거움, 좌절 시의 애절함을 묘사하므로 일반적으로 《정가》로 번역됩니다.
《정가》의 티벳어 원본은 널리 유통되며, 구전, 필사본, 목판본 등으로 출판되어 티벳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습니다. 중문 번역본은 국내외적으로 적어도 10가지 이상이며, 외국어 번역본으로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러시아어, 인도어 등이 있습니다. 이로써 《정가》는 티벳 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 시단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창양 가초는 그의 독립된 사상과 행보를 통해 티벳 불교의 규율을 넘어서서 진정한 교리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는 티벳의 문학과 문화를 풍부하게 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창양 가초의 삶과 시는 그의 복잡한 인간성을 드러내며, 그의 사상과 영향력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티벳의 자연과 문화를 찬미하는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창양 가초는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 정서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