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에 사원의 위치
만약 당신이 티벳을 방문해서 단 하나의 사찰만 봐야 한다면, 저는 사미에 사원(桑耶寺, Sāngyē Sì)을 방문해보기를 추천합니다.상예사는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찰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미에 사원은 조캉사원(大昭寺)와 라모체 사원 (小昭寺)에 비해 최소 몇십 년 후에 건설되었지만, 왜 사미에 사원이 티벳 최초의 불교 사찰로 불리는 것일까요?
송첸캄포(松赞干部, Sōngzàn Gānbù) 시대에 이미 중국 당나라와 네팔에서 불교가 도입되었고, 조캉사원과 라모체 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않았으며, 조캉사원과 라모체 사원도 불상만을 모신 장소에 불과했고, 완전한 의미에서의 출가 승려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츠쑹데짠(赤松德赞, Chìsōng Dézàn) 시대에 이르러, 시후(寂护, Jìhù) 대사와 파드마삼바바(莲花生, Liánhuāshēng) 대사를 티벳으로 초청하여 사미에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곳에서 티벳 최초의 출가 승려들이 탄생했습니다. 사찰의 정의에 따르면, 불법승(佛、法、僧)의 삼보가 모두 갖춰져야 불교 사찰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미에 사원은 명실상부한 티벳 최초의 사찰입니다.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은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삼보(三宝)”라고 불리는 세 가지 보물입니다.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불(佛, Buddha):
- 부처님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달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역사적으로는 석가모니를 지칭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 법(法, Dharma):
-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나 진리를 의미합니다. 불교의 가르침, 진리, 수행 방법 등을 포함합니다. 법은 불교 수행자들이 따르고 실천해야 할 길을 가르쳐 줍니다.
- 승(僧, Sangha):
- 불교 공동체, 특히 출가한 승려들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승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실천하며, 불법을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삼보는 불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불교 신자들은 이 삼보에 귀의하며 삶의 지침으로 삼습니다.
사원의 구조 - 만다라
사미에 사원은 티벳 산남지구의 자낭현(扎囊县) 야룽장푸강(雅鲁藏布江)의 티벳 4대 성스러운 산 가운데 하나인 하부르 산(哈不日山) 자락에 있으며, 티벳에서 처음으로 출가한 승려들이 있던 사원입니다.
또한, 티벳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불상, 불경, 승려가 갖춰진 사원으로, 티벳 불교의 만다라를 기본으로 건축되었기에 사람들은 “건축사상의 걸작”이라고 부릅니다.
만다라 (曼茶羅)는 고대 인도에서 수행자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여러 부처와 보살에 대한 공양을 강조하기 위해 사각형 또는 원형의 흙으로 만든 단을 설치한 후 수행 의식을 행하면서 공양을 올린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티벳 불교에서는 만다라를 수행자들의 수행 방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사미에 사원은 이 만다라를 기초로 건축되어 있어, 티벳 불교의 우주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미에 사원의 중심에는 2층의 대전이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합니다. 또 이 건물의 네 방위에는 4개의 불전이 세워져 있고, 그 부근에 각각 2개의 작은 법당이 있습니다.
또한, 이 대전의 좌우 양측에 작은 소전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대전의 모서리 부분에는 각 탑이 세워져 있는데, 모든 악신과 마귀를 정복하여 천재지변을 제지하고자 하는 상징입니다. 이러한 모든 건축은 마지막으로 타원형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미에 사원의 대전은 현재 2층이지만 본래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층은 티벳 양식으로, 2층은 중국의 한족식으로, 3층은 인도의 건축양식을 결합하여 특별하게 건축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사미에 사원을 비슷한 발음의 “삼양사(三样寺)”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3층은 최근에 무너져서 없어졌고, 현재는 1층과 2층만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티벳 회화의 역사
당시의 치쏭 데짼(적송덕찬,赤松德贊) 티벳 왕은 사원이 완성된 후 인도에서 열두 명의 승려를 불러와서, 귀족 자제 7명에게 머리를 자르게 하고 승려가 되게 하여 사미에 사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칠각사(七觉士)”라 불렀으며, 그들의 출현으로 티벳 불교 발권의 기초가 되었으며, 티벳의 모든 사원이 이곳을 기초로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전의 복도 양쪽으로 벽화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티벳의 역사와 티벳 불교의 생성 과정, 그리고 달라이 라마의 공적도 그려져 있습니다. 티벳 라마교 겔룩파(황교)의 창시자인 총카파가 불교를 전수하는 과정에서부터 제9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역사는 장장 92m 길이의 벽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기에 많은 사람이 이 벽화를 티벳의 “회화사기(史)”라고 부릅니다.
역사적 유물
본전 문 앞에는 당나라 양식의 구리종이 걸려 있는데, 이 종은 왕족 귀족이 탁발승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조한 것으로 티벳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리로 만든 종이라 전해집니다. 동문의 남쪽에는 유명한 “상예흥불증감비(桑耶兴佛证监碑)”가 있습니다. 이 비석은 당시의 티벳 왕인 치쏭 데짼이 799년 불교를 티벳의 국교로 한다는 내용을 고대 티벳어로 적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미에 사원은 청나라 시기 큰 화재로 인해서 서적과 많은 건물이 불타 모두 재로 변해버렸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달라이 라마 6세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1996년 중국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다음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자금을 투자하여 보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파드마삼바바
티벳은 38대 임금인 치쏭 데짼이 다스리던 시대로서, 치쏭 데짼은 국교를 불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미 100년 전에 송첸캄포 왕이 불교의 터전을 닦았지만, 불교는 왕과 몇몇의 귀족들만 믿는 종교였고, 대부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토착종교인 뵌교(苯教)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치쏭 데짼이 국교로 불교를 선포하자, 뵌교 사제들과 그들의 엄호 세력인 귀족들로부터 반감을 사기 시작했고, 왕과 뵌교 신도들 사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졌습니다. 왕은 뵌교를 탄압하고, 뵌교 사제들은 몰래 왕을 저주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치쏭 데짼은 티벳 최초의 사원인 사미에 사원을 건설하여 불교를 더욱 확장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도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시의 유명한 승려인 샨타라크쉬타를 모셔와 사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사원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뵌교의 귀신들의 방해로 낮에 건축하면 밤에 무너지는 현상이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그러자 샨타라크쉬타는 치쏭 데짼에게 자기의 공덕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으니, 자기의 제자 가운데 귀신을 다스릴 줄 아는 파드마삼바바를 데리고 오기를 부탁하였습니다. 파드마삼바바가 티벳으로 들어오자 치쏭 데짼은 너무 기뻐서 많은 금을 가지고 라싸 근교에까지 마중 나갔지만, 파드마삼바바는 “나는 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금을 먼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 후 다시 모래를 한 줌 쥐고 주문을 외우자 다시 금이 되는 도술을 부렸습니다.
파드마삼바바는 스승인 샨타라크쉬타와 함께 사미에 사원으로 가서, 귀신을 물리치고 드디어 779년에 사원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