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니고도(蕃尼古道)의 개통과 발전
번니고도는 당대에 토번(吐蕃, 티벳)과 니파라(尼婆罗, 네팔)를 연결하던 고도(古道)의 약칭입니다.
현재 라싸에서 시작하여 네팔의 카트만두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라싸를 거쳐 시안으로 향하는 당번고도(唐蕃古道)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카트만두를 거쳐 인도로 통하는 길과 연결됩니다.
이는 중국 티벳와 내지에서 네팔, 인도 및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로, 실크로드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기도 합니다.
번니고도의 역사적 명칭과 역할
역사에서 이 도로를 ‘번니고도(蕃尼古道)’라고 부르는데, 속칭 ‘상도(商道)’, ‘관도(官道)’, ‘불도(佛道)’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네팔의 부리쿠티 공주인 치즌공주(赤尊公主)가 토번의 왕 송첸캄포에게 시집을 갈 때, 송첸캄포 왕이 망역(芒域)이라는 곳까지 사람을 보내 치즌 공주를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이 망역이라는 지역이 현재의 지롱거우 근처로 이곳까지 사람을 친히 보낸 것입니다.
번니고도와 티벳 불교의 전파
치즌공주가 시집올 때 티벳 불교인 본교의 호법 신인 ’12여 신’을 가지고 오면서 불교가 티벳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루트를 통해 불교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제지 기술이 네팔과 인도로 넘어가는 중요한 도로가 되었습니다.
번니고도의 개통과 실크로드의 변화
번니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기존의 실크로드와 차마고도가 중국과 인도의 중요한 통로였으나, 번니고도가 개통되면서 네팔, 인도를 거쳐 서양에까지 문화가 전파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 또한, 신라의 혜륜(慧輪), 혜업(慧業), 현각(玄恪), 현태(玄太) 등 4명의 구법승도 이 도로를 통해 인도로 왕래하였습니다.
번니고도의 역사적 기록
번니고도는 658년경에 개통되었으나, 문헌에서는 주로 서쪽 구간의 경로와 역참(驿站)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나머지 구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승려 도선(道宣, 596-667)은 그의 저서 《석가방지》(释迦方志)에서 이 도로를 처음으로 언급하면서, 이 도로를 한(汉)과 당(唐) 이래 중국에서 인도로 통하는 세 가지 길 중 하나인 “동도(东道)”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도선은 이 도로의 경로와 노선을 특히 서쪽 구간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해 이 도로는 라싸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후장(后藏) 지역을 지나 지롱현으로 향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네팔로 이어지는 대략적인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번니고도의 재발견과 현대적 역할
1990년, 지롱현에서 당 고종(唐高宗) 시기에 세워진 《대당천축사출명》(大唐天竺使出铭) 비석이 발견되면서 이 도로의 존재가 입증되었습니다.
이 비석은 당나라 사절 왕현책(王玄策)이 이 도로를 통해 네팔을 거쳐 인도로 갔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토번 군대가 이 도로를 통해 왕현책을 도와 임무를 완수했음을 증명합니다.
송대에 이르러 번니고도의 노선과 역참은 문헌에서 점차 명확해졌습니다.
번니고도의 송대 발전
송대 초기, 티벳의 유명한 번역가이자 불학자인 열역사(热译师) 다지작(多结札, 1016-?)은 네 번에 걸쳐 네팔로 가서 불법을 구하였으며, 두 번째 귀환 시 번니고도를 통해 지롱으로 들어와 딩리, 셰가르, 사가, 라쯔 등을 거쳐 시가체, 산남, 라싸와 캉구 등지에 불법을 전했습니다.
1042년, 인도에서 초청된 유명한 불학자 아디샤(阿底峡, 982-1054)는 번니고도를 통해 네팔을 거쳐 지롱으로 들어와 서북쪽으로 푸랑까지 갔다가 다시 짜다로 향했습니다.
명대와 청대의 번니고도 역할
명대에 이르러 번니고도의 역할은 더욱 다양해졌으며, 그 중 일부 역할이 변화했습니다. 명대에는 번니고도가 군사, 경제, 정치적 기능을 모두 수행했으며, 특히 중앙 정부가 티벳를 통치하고 중니(中尼, 중국과 네팔)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청대에 이르러 번니고도의 역할은 더욱 다원화되고 종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1792년 청군이 궈얼카(廓尔喀)인의 침입을 격퇴한 이후, 번니고도는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번니고도 고대 인물들의 발자취
고대 인물들의 발자취
- 연화생대사(莲花生大士)가 이곳을 통해 티벳에 들어왔습니다.
- 치즌공주(尺尊公主)도 결혼 사절단을 이끌고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 당나라의 전설적인 사절 왕현책(王玄策)도 이곳을 지났습니다.
- 건륭제(乾隆帝) 또한 궈얼카(廓尔喀)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이곳을 통해 진군했습니다.
- 신라의 혜륜(慧輪), 혜업(慧業), 현각(玄恪), 현태(玄太) 등 4명의 구법승도 이 도로를 통해 인도로 왕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