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통일과 티벳과의 교역
‘궈얼카(廓尔喀)’는 오늘날의 네팔입니다. 1769년부터 1790년까지 궈얼카 지도자 샤는 무력을 사용해 네팔을 통일하고 ‘궈얼카 왕조’를 세웠습니다. 당시 네팔이 필요로 한 소금은 티벳에서 수입했습니다.
6대 판첸라마의 죽음과 재산 분쟁
6대 판첸라마(班禅喇嘛)는 청더(承德)의 피서산장을 방문한 후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수많은 재물이 쏟아졌고, 당시 티벳의 최고 권력자인 달라이 라마 버금가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780년 11월 2일에 베이징에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청 황제는 막대한 황금을 부조금으로 지불하였습니다.
6대 판첸라마의 라장(拉章)은 6대 판첸라마의 형제인 타쉬룬포(扎什伦布寺) 관리자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이징에서 받은 수많은 금은 보화는 타쉬룬포 자선룬부쓰(扎什伦布寺) 관리자에게 상속되게 끔 되어있었습니다.
베이징 여행에 같이 갔던 6대 판첸라마 배다른 형제인 10대 샤마바(夏玛巴) 환생불인 췌주자춰(却朱嘉措)가 재물 중 일부를 상속받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베이징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고, 축하로 받은 재물과 부조금으로 받은 제물등 모든 재물을 6대 판첸라마의 시신과 함께 타쉬룬포로 보냈습니다.
췌주자춰의 피신과 전쟁 촉발
이에 췌주자춰는 1788년 구루카 왕국(廓尔喀王国)으로 피신합니다. 구루카 왕국은 췌주자춰의 교파인 닝마파(宁玛派, Nyingma)와 좋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췌주자춰를 받아드렸습니다.
췌주자춰는 티벳과 네팔 사이의 은화 문제와 티벳에서 판매한 소금에 흙을 첨가했다고 비난하면서, 이를 문제 삼아 티벳을 침공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사실 췌주자춰의 목적은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에 있는 수많은 보물이었습니다.
화폐제도 개혁과 무역 분쟁
16세기부터 티벳과 네팔은 은화를 사용하여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티벳에서 사용되던 화폐는 돌맹이처럼 생긴 은조각이었습니다.
이 은조각은 중량도 일정하지 않았고, 울퉁불퉁하여 휴대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 네팔에서 은화가 유입되었는데, 네팔의 은화는 중량이 일정하고 납작한 동전 형태라 휴대하기 매우 편리했습니다. 이 때문에 네팔 은화는 순식간에 전 티벳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티벳 상인들은 네팔의 세 왕조에게 티벳에서 사용할 은화를 제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티벳 상인들은 은조각을 지불하고 은화폐를 받아가는 은화 무역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량의 백은이 네팔로 유입되었고, 네팔은 티벳의 은화 제조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은화 품질 저하와 갈등
그러나 네팔에서 제조된 은화에는 불순물이 섞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은화의 품질이 점점 저하되었습니다.
게다가 세 왕조에서 제조된 은화는 각각 모양과 중량이 달랐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되는 은화는 비교적 중량과 품질이 좋은 은화로 제한되었습니다.
네팔 왕국의 형성과 화폐 문제
1768년, 궈얼카족의 샤 왕조는 당시 강대했던 말라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트만두를 점령하여 네팔 전역을 통일하고 네팔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당시 이 왕국은 궈얼카 왕국으로 불렸습니다. 샤 왕조의 은화는 이전 세 왕조의 은화보다 은의 함량이 높고, 중량과 품질이 뛰어나 티벳 전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티벳는 이전의 저질 은화를 궈얼카 왕국에서 회수하고, 샤 왕조의 은화로 교환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두 화폐의 교환 비율에 대해 양측은 이견을 보였습니다.
티벳 측은 같은 중량의 은화로 교환하기를 원했지만, 궈얼카 왕국은 세 왕조의 불량 은화를 자신들이 책임지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양국은 환율 문제로 마찰을 빚었고, 여러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결렬되었습니다.
결국, 궈얼카 왕국은 티벳을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1788년 궈얼카의 첫 침입
건륭 53년(1788년) 5월, 궈얼카는 티벳 가사정부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티벳에서 사용되는 은화는 모두 우리 바르부에서 주조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새 화폐만 사용하고, 구화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티벳와 바르부 접경 지역인 네랄무와 지룽 지역은 원래 우리 바르부의 땅이므로 반환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면 관리를 파견하십시오.”
티벳 가사정부는 다음과 같이 회신했습니다:
“신화의 수량이 적어 유통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신화와 구화를 혼용할 것입니다. 네랄무와 지룽 지역은 티벳의 영토이며, 양측 간에 의문이 없습니다. 지금은 날씨가 더우니 입동이 되면 사람을 파견해 논의하겠습니다.”
그러나 가사정부는 이 문제를 청나라의 주티벳 대사에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궈얼카는 또한 티벳이 바르부 물품에 대해 “임의로 세금을 부과하고” 티벳에서 바르부로 수출하는 소금에 흙을 섞었다고 비난하며, 티벳을 침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788년, 궈얼카 군대가 티벳에 침입했고, 약탈을 한 후 큰 눈으로 인해 대부분이 네팔로 철수했습니다.
건륭 황제의 명에 따라 사천에서 티벳으로 들어간 청군은 궈얼카 군대가 철수한 것을 보고 추운 날씨 때문에 내지로 돌아갔습니다.
1791년 궈얼카의 재침입과 청나라의 대응
그러나 2년 후인 1791년, 궈얼카 군대가 다시 티벳에 침입했습니다.
청 건륭 연간에 궈얼카(현 네팔)군이 티벳으로부터 세폐를 요구했으나 실패하자, 라싸가 약속을 어겼다는 구실로 티벳을 침략했습니다.
그들은 니얄람(聂拉木), 팅그리(定日), 사가(萨迦), 지룽(济咙), 시가체(日喀则)를 차례로 점령하고 타쉰룬포 사원을 약탈하여 티벳 전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건륭 황제는 대장군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한족, 티벳족, 만주족 등 여러 민족의 병사들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궈얼카(廓尔喀)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청-티벳 연합군은 티벳 지역 주민들과 힘을 합쳐 7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침략자를 국경 밖으로 몰아낸 뒤 네팔의 수도까지 진격했습니다. 결국 네팔 국왕은 청나라 중앙 정부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습니다.
'흠정장내선후장정' 제정과 제도적 변화
전쟁이 끝난 후, 복강안은 당시 주티벳 대신 화신의 동생 화림, 사천 총독 혜령, 티벳 지방의 섭정 제룽 후투크투와 함께 티벳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흠정장내선후장정’(역사적으로는 ‘흠정 29조’)을 제정했습니다.
여기에는 티벳 상비군 제도, 군관 승진 제도, 티벳에서 ‘건륭보장’ 화폐 주조 제도, 주티벳 대관이 티벳 지역 사무를 관리하는 제도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가장 역사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티벳 지방의 활불 전생에 ‘금병첩채’ 제도를 채택한 것입니다.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