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번 왕조의 붕괴와 혼란
토번 왕조(吐蕃王朝)가 붕괴한 후, 전쟁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주민들은 전국적으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으로 인해 왕족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먼 티벳 변방에 여러 작은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르마(朗达玛)의 증손자이자 워송(沃松) 왕계의 후손인 기드니마군(吉德尼玛衮)은 샹슝(象雄)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현지 지도자의 지원을 받아 600년 넘게 이어진 구게 왕조를 세웠습니다.
구게 왕조의 형성
구게 왕조가 알리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초대 왕 기드니마군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진정으로 구게 왕조의 기틀을 세운 사람은 티벳 역사상 빛나는 라라마·예시워(拉喇嘛·益西沃)였습니다. 예시워의 구게 왕조와 티벳 불교에 대한 공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과 구게 왕국의 발전
기드니마군은 늙어가면서 토번 왕조의 두 아들이 왕위를 다투다 자멸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세 아들인 베기데·리바군(贝吉德·日巴衮), 자시데군(扎西德衮), 그리고 데쭈군(德祖衮)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중 자시데군은 부장왕(布让王)으로 봉해져 구게(현재의 普兰푸란), 그리고 야즈(亚孜 현재의 네팔 무스탕)를 다스렸습니다.
자시데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매우 드물어 그의 정확한 통치 기간을 추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그의 재위 시기는 약 950년~975년으로 추정됩니다.
자시데군의 왕국과 구카니송 궁전
자시데군의 왕국 중심지는 신탁을 받아 지어진 구카니송 궁전(현재 푸란의 가얼동(嘎尔东) 성터)이었습니다.
자시데군의 왕조는 후세에 구게 왕조(古格王朝)로 불렸지만, 왕국의 중심은 초기에는 구게가 아닌 부장이었습니다.
자시데군의 호칭은 확실히 구게왕이 아닌 부장왕이었으며, 구게는 한동안 왕국의 속령이었습니다. 자시데군은 두 아들, 커레(柯热)와 송어(松额)를 두었으며, 커레 왕자는 부장왕으로 송어는 구게왕으로 분봉되었습니다.
불교의 부활과 예시워의 역할
구게 왕국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은 후 4번째 왕인 송어 왕(松额 또는 松艾)은 불교를 다시 한 번 부활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는 구게에서 불교를 대대적으로 확산시키고 많은 사원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자신과 두 아들을 불교에 귀의시켰습니다.
그는 왕위를 형 커레에게 넘기고 출가하여 ‘라라마·예시워(拉喇嘛·益西沃)’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티벳어에서 ‘라(拉)’는 ‘하늘’ 또는 ‘신’을 의미하고, 라마(喇嘛)는 스승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라라마·예시워’를 풀이하면 하늘의 스승(天喇嘛), 또는 신성한 스승(神上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불교 위기와 구게 왕국의 대응
당시 인도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와 불교를 말살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불교의 고향인 인도에서는 당시의 불교에 관한 대부분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를 피해 인도에서 넘어온 수행자들이 구게 왕국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사람들을 이용하고 사기를 치는 일이 빈번이 발생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토번 왕조의 멸망 시기처럼 본교의 승려와 불교의 승려가 서로 가르침을 문제 삼고 서로 폄하는 풍토도 생겨났습니다.
예시워의 대책과 학자 파견
토번 왕조의 멸망 원인을 잘 알고 있던 예시워는 이런 혼란을 바로 잡아 줄 위대한 스승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인도로 학자들을 보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21명의 젊은 학자들을 인도 카슈미르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인도 카슈미르의 더운 기후와 전염병으로 인하여 19명은 사망하고 2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중 린첸상부는 성실한 학자로서 후에 티벳의 유명한 번역가가 됩니다.
아티샤 대사의 초청과 예시워의 희생
송어는 또한 21명의 유망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많은 황금을 지참하게 하고, 카슈미르와 인도로 보내 불법을 배우고 고승을 초청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들은 대부분 현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도중에 사망했으며, 후에 대번역사라 불리우는 린첸상포(仁钦桑布)와 소번역사라 불리우는 브장·러베시라오(布让·勒贝西绕), 이렇게 2명 만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예시워는 75명의 반지다(班智达, 학식이 풍부한 대학자)를 초청하여 자다현 시내에 있는 퉈린스 (托林寺) 사원에서 대규모 번역원을 설립했습니다.
이 번역원은 대번역사 린첸상포의 지도하에 운영되었으며, 많은 불교 경전이 이곳에서 번역되고 교정되었습니다. 린첸상부는 인도에서 돌아오면 많은 불경을 가지고 왔으나, 번역하고 그것을 배우는 데는 큰 진전이 없었습니다.
아티샤 초청을 위한 노력과 예시워의 희생
이에 린첸상부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스승님은 아티샤라는 분으로서 그분을 모셔와서 가르침을 받는다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티샤는 무려 152명의 스승을 모시고 배워 현자가 된 인물로 인도에서는 매우 유명한 스승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큰 가르침이나 상업을 할 때는 황금으로 값을 지불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예시워는 위대한 스승에게 드릴 황금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황금을 얻기 위해 고루록(葛逻禄)이라는 서쪽의 무슬림 국가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고루록의 왕은 예시워를 직접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예시워는 단호하게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다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몸무게만큼의 황금을 가져오면 살려주겠다.”
그러나 예시워는 다시 한 번
“아니오!”
라고 답했습니다.
예시워의 희생과 아티샤의 티벳 행
예시워가 잡혔다는 소식이 고국에 전해지자, 티벳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나라 전체가 황금을 모으기 위해 분주해졌고, 승려와 백성들에게까지 황금 세금을 걷었습니다.
결국 예시워의 몸무게만큼의 황금을 모은 후, 그의 조카 장취워(降曲沃)가 고루록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고루록의 왕은 다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의 머리 무게만큼의 황금이 더 필요하다.”
이 말에 장취워는 눈물을 흘리며 예시워와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곧 돌아가서 필요한 황금을 더 모아오겠습니다.”
예시워는 조카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고통을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나를 구하는 것보다는 이 황금을 가지고 인도로 가서 아티샤 대사(阿底峡)를 초청해 고국에 불법을 전파해라. 그리고 자기가 스승을 모셔오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는 걸 아티샤 스승에게 말하라고 하여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예시워는 감옥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시신은 고국으로 운구되어 탑에 안장되었습니다.
아티샤의 티벳 정법 전파
이에 장취워(降曲沃)는 큰 감명을 받고 황금과 번역가인 낙초를 인도로 보냈습니다. 인도에 도착하여 아티샤 스승을 만난 낙초는 예시워 왕의 죽음과 장취워의 노력을 잘 전달하였고, 이 노력에 감명을 받은 아티샤는 그들과 함께 티벳으로 넘어와 정법을 전했습니다.
예시워를 이어 왕이 된 장취워(降曲沃) 왕은 300명의 신하를 데리고 마중 나와 눈물을 흘리며 아티샤를 맞이하였습니다. 아티샤는 티벳에 머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출가한 승려들은 계율을 바르게 지키도록 규율을 세웠습니다.
아티샤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자 잘못된 가르침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티벳은 다시 한번 불교 국가의 틀을 다시금 다질 수 있게 되었고, 구게왕국을 불교의 메카로 만들었습니다.
쫑카파의 불교 개혁과 구게 왕국의 역할
아티샤의 뒤를 이어 티벳 불교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총카파입니다.
뒤에 총카파는 티벳 불교를 개혁하여 4대 종파 중 하나인 겔룩파를 창시합니다.
예셰웨왕의 목숨받친 희생과 라디왕의 노력으로 이러한 불교의 전성기를 다시 한번 이끈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구게 왕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