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첸캄포 시대의 불교 전파와 티벳의 첫 불상
송첸캄포(松赞干布) 시대에 티벳에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송첸캄포는 네팔의 브리쿠티(Brikuti) 공주와 당나라의 문성공주(文成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두 공주는 시집을 오면서 각각 불상 한 기씩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불상들이 바로 티벳 최초의 불상입니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조캉사원(大昭寺)과 라모체 사원(小昭寺)이 건설되었으며, 이로 인해 불교가 티벳에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티벳의 귀족들은 대부분 토착 종교인 본교(苯教)를 믿고 있었으며, 궁궐 안 일부 귀족들만이 불교를 믿고 있었습니다.
티송데첸 시대의 불교 활성화
송첸캄포가 사망한 지 100년 후, 티송데첸(赤松德赞) 시대에 이르러서야 불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티송 데첸은 열렬한 불교 옹호자였으며, 불교를 티벳의 공식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이에 본교의 승려들과 귀족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으나, 티송 데첸은 인도 출신의 파드마 삼바바(莲花生大士)를 초청해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사미에 사원(桑耶寺)을 건설하고, 본교 승려들과 어전 토론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불교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무네젠뽀와 티데송첸의 불교 옹호
티송 데첸의 아들인 무네젠뽀(牟尼赞普)와 티데송첸(赤德松赞) 역시 불교를 옹호했습니다. 티데송첸이 사망한 후, 그의 셋째 아들 티축데첸(赤祖德赞)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티데송첸에게는 첫째 아들이 이미 불교로 귀의하였고, 둘째 랑다르마(朗达玛)와 셋째 티축데첸이 왕위를 다투고 있었습니다.
불교를 믿는 귀족 세력이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티축데첸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불교를 비상식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승려를 우대하여 귀족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막대한 땅을 하사했으며, 평민 7명이 1명의 승려를 부양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승려를 불손한 눈으로 보거나 삿대질하면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이에 본교를 믿는 귀족들과 승려들의 불만이 커졌고, 결국 티축데첸은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랑다르마의 폐불 정책
티축데첸이 암살된 후, 본교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랑다르마(朗达玛)는 강압적인 폐불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랑다르마는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즉위 후 별다른 정책을 펼치지 않았으나, 티벳 전역의 지진과 자연재해로 왕실 재정이 부족해지자 승려들에게 제공되던 지출을 끊어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승려들이 환속했지만 민심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랑다르마는 자연재해의 원인이 불교라고 주장하며 폐불을 선언했습니다.
사원의 대표와 권력 있는 불교 승려들을 죽이고, 승려들에게 환속을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도망친 승려들로 인해 오히려 불교는 티벳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랑다르마의 암살과 왕위 계승 분쟁
한 승려가 랑다르마를 암살한 후, 랑다르마의 두 부인 사이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부인은 자식이 없었고, 둘째 부인은 임신 중이었습니다.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오숭(俄松)이 왕위에 올랐으나, 첫째 부인은 조카 윰텐(Yumten, 墀德云丹)을 자신의 아들이라 속이고 왕자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숭이 왕위에 오른 후, 윰텐을 지지하는 본교 귀족들과의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위 쟁탈전과 티벳의 분열
오숭은 야롱계곡(雅砻河谷)을 근거지로 삼아 윰텐과 왕위 쟁탈전을 벌였고, 결국 독살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베카오잔(贝考赞)은 시가체(日喀则)로 피신했으나 평민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의 아들 지더니마(吉得尼玛)는 아리(阿里) 지역으로 피신하여 지방 세력의 딸과 혼인하면서 세력을 다져나갔습니다. 지더니마는 형제들 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 ‘형제들의 권한은 서로 분리한다’는 규칙을 확립하고, 세 아들에게 아리 지역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 반지군(班吉衮)에게는 라다크 왕국(拉达克王国), 둘째 데즈곤(德祖衮)에게는 푸란 왕국(普兰王国), 셋째 자시군(扎西衮)에게는 구게 왕국(古格王国)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티벳 불교의 확산과 정교일치의 기틀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